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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요약]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일화, 사상, 오해와 진실

by dailymemo 2025. 5. 15.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1787년

 

 

생애

 

소크라테스는 석공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기원전 470년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평범한 서민가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연마했고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의 공부에도 힘을 썼다. 특히 뛰어난 언변으로 아테네 아고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아 토론하는 것을 즐겨해서 사람들이 그를 피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외모가 못생겼다고 유명하다. 하지만 추한 외모만큼이나 몸이 다부져서 전투에 나가서도 힘든 내색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아내인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로 전해진다. 후대로 내려오며 왜곡된 부부인 있지만 그녀의 성격이 다혈질적이고 잔소리가 심하며 남편을 달달 볶았다고 전해진다.

 

한번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을 받은 델피 신전의 기둥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라고 착각한다. 한편 신탁의 내용에 대해 놀란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에 의구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물음을 던지면 던질수록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하고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곤 했다. 결국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다. 이런 자신도 진리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현명한 이유는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변이 뛰어나고 현명하다고 정평이 난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청년들이 점점 많아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 명이자 수제자이며, 그에 대한 기록을 가장 많이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 정치적 음모에 휘말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지배를 당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의 민주정이 복원된다. 아테네 권력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고 거절한 것에 불만을 품고 그에게 정치적 망신을 주기 위해 신성 모독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를 죄목으로 법정에 세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배심원들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의 사형선고는 그저 망신을 주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편법을 이용하거나 용서를 구해 사형을 면할 수도 있었지만 소크라테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결국 71세의 나이에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다. 

 

죽기 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으니 대신 갚아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했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은 닭을 바쳐야 했다. 말 그대로 살아있을 때 아파서 신전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닭을 바치지 못해서 대신 갚아달라는 뜻일 수 있다. 또 '삶'이라는 병에 대해 '죽음'이라는 치료를 받은 것에 대한 빚을 받았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문제

 

소크라테스는 생전 어떠한 기록물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플라톤 같은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그의 말이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과 말을 우리가 직접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을 수밖에 없다. 실제 소크라테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다는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부른다.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화법으로 대화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렸다. 결론을 내어 답하기보다는 추가적인 질문을 연이어 함으로써 상대의 모순을 파고들고 결국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화법이다. 그는 단순히 상대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했다. '산파술'이라는 이름은, 출산을 하는 것은 산모이지만 여러 기술을 통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옆에서 돕는 산파의 역할에서 유래됐다. 스스로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고 이러한 변증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도 부른다. 그는 스스로를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말이 졸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물어 대는 등에'라고 표현했다. 

 

절대적 진리

 

당시 아테네 거리의 소피스트들은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이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런 신념을 지켰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법이라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정의라는 자신의 철학을 지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 플라톤

2025.05.16 - [철학] - 플라톤의 생애와 사상

 

플라톤의 생애와 사상

, 라파엘로, 1511년 생애 플라톤은 아테네 최고의 정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테네 왕가의 후예였으며 어머니는 위대한 정치가 솔론의 후예였다.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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